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르미온 전투 (문단 편집) == 전투 == [[파일:external/mek.oszk.hu/banlaky-big_hadtortpic_0409.jpg]] 군세가 비슷한 양군은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근래의 승전으로 사기가 올라있던 헝가리군은 기사 - 중기병의 충격력을 믿고 이를 중심으로 삼아 보병과 뒤섞은 진형을 갖췄고, 제국군은 예비대인 중군과 기병 비율이 높은 좌우 1진, 보병이 주력인 좌우 2진으로 진형을 짰다. 정찰을 통해 상대를 가늠한 쌍방은 헝가리군이 전진하고 동로마의 좌, 우 1진이 기세를 꺾기 위해 사격을 가하면서 전투를 개시했다. 그러나 헝가리 기사대의 돌격은 멈추지 않았고 곧 제국군의 장창진에 부딫혔다. 이는 쌍방에 큰 타격을 주었고 특히 충격을 받는 입장인 제국군이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끝내 전열은 붕괴되지 않았고 작전이 꼬여 이탈했던 1진이 복귀하여 헝가리측의 진격이 크게 둔화되었다. 헝가리 측 사령관인 데네시는 동로마 측의 반격이 개시되자 적의 예비대인 중군을 타격하여 전황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이는 좌절되었고 안드로니코스 장군이 [[바랑기안 가드]]를 중심으로 하는 예비대를 투입하자 헝가리군의 패색이 짙어졌다. 12시간에 달하는 전투 끝에 - 병장기들이 못 쓰게되어 부무장인 메이스(mace) 따위의 둔기를 꺼낼 지경이었다. - 헝가리군은 붕괴되었고 수천여가 죽거나 다쳤고 나머지는 패주했다. 도나우 강 방면으로 도망치던 헝가리군은 이미 강을 거슬러와있던 동로마 해군에게 공격당해 800여명의 포로와 5명의 지휘관을 생포당했다. 당일 전장에서 한번, 다음날 텅 빈 헝가리군의 진영을 두번째로 약탈한 제국군은 수도로 승첩 장계를 올렸고 얼마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문(Golden Gate)으로 개선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